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성남시 향토유산

정일당강씨묘 정일당강씨묘

정일당강씨묘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1986.3.4

  • 위치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75

송산조견선생묘 송산조견선생묘

송산조견선생묘

조견(趙狷, 1351~1425)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종견(從犬), 호는 송산(松山)이고, 초휘(初諱)는 윤(胤)이다.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 1227~1308)의 증손이자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덕유(趙德裕, 1314~1352)의 아들이며, 영의정 조준(趙浚, 1346~1405)의 동생이다. 한때 승려였으나 환속하여 1371(공민왕 20)년 문과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남안렴사(嶺南按廉使)를 지냈다. 조준(趙浚, 1346~1405)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 조선을 건국한 후 개국공신으로서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1394년 경상도도절제사, 1397년 지중추원사, 1403년 좌군도총제가 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하여졌다. 1411(태종 11)년 평성군(平城君)으로 개봉(改封)된 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421(세종 3)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진하사(進賀使)와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조견의 묘역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유행대로 3단의 계체석(階砌石) 구조를 갖춘 방형(方形) 봉분(높이 180cm)이며, 이와 함께 상석, 문인석, 장명등의 옛 석물이 진설되어 있다. 봉분 하단에는 사각호석을 마련하였으며, 주위의 좌·우·후 3면에는 90㎝의 간격을 두고 60∼110㎝ 높이의 축대를 쌓아 활개를 대신하고 있으며, 봉분 양측에는 높이 54X35X100㎝의 석주를 세웠다. 또한 곡장(曲墻)의 기단 및 장방형(長方形) 주초석(높이 102㎝)이 남아 있다. 2단의 묘정(墓庭)에 상석(높이 28㎝)과 문인석, 3단의 묘정에 장명등을 두었다. 봉분 좌우에 세워져 있는 안두(按頭)의 문인석(文人石)은 좌가 높이 148㎝의 3등신의 신체 비율이며 좌측 귀가 파손되어 있다. 복두공복(幞頭公服)을 착용하고 있으며, 얼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몸집이 상체에서 하체로 내려갈수록 가늘어지는 양식상의 특징이 있다. 또 장명등(높이 76㎝)은 개석(蓋石)이 없어지고 화사석(火舍石)의 상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조선 초에 관직을 제수한 기록과 조선 중기 고려조의 충신으로 인정받은 기록이 있어 행적에 대한 이견이 있으나, 본 묘역은 여말선초의 사대부 묘제를 나타내는 유적이자 인근 묘역(자손묘)을 통해 고려 및 조선시대의 묘제를 함께 조망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2001. 2. 20.

  • 위치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금릉남공철묘역 금릉남공철묘역

금릉남공철묘역

금릉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조선 후기 정치가·문장가이며,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이다. 남한기(南漢記)의 손자이며,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의 아들이다. 모친은 김석태(金錫泰)의 딸이다. 1780(정조 4)년 초시에 입격한 후, 1784년 부친이 정조의 사부(師傅)였던 관계로 음보(蔭補)로 세마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부교리, 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또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었으며, 김조순(金祖淳), 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동참했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에 있으면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했다. 순조 즉위 뒤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했다. 1807(순조 7)년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 간 재상을 역임하였고, 18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평소 김상임(金相任), 성대중(成大中), 이덕무(李德懋)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독서를 좋아했고, 경전의 뜻에 통달했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했고, 많은 금석문·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서예사의 '전사자체(全史字體)'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순조, 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이 있다. 시문집으로는 『귀은당집(歸恩堂集)』, 『금릉집(金陵集)』, 『영옹속고(穎翁續藁)』,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영은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묘역은 수정구 금토동에 있는데, 봉분 및 석물은 옛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원형의 봉분은 용미와 활개가 없고, 지위에도 불구하고 문인석과 신도비를 갖추지 않아 검소하다. 특히 비석은 당나라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집자하여 제작한 것으로 금석학에 귀중한 자료로서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2002. 12. 16.

  • 위치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66

경헌조몽정묘역 경헌조몽정묘역

경헌조몽정묘역

조몽정(曺夢禎, 1535~1595)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응길(應吉), 호는 경헌(敬軒)이다. 무과를 거쳐 부사를 지낸 조등(曹璒)의 증손이고, 문과에 합격하여 관찰사를 지낸 조한필(曺漢弼)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문과에 합격하여 호조좌랑을 역임한 조언박(曺彦博)이며, 어머니는 윤유(尹瑠)의 딸이다. 조몽정은 효성이 지극하여 13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어린 나이에도 묘 아래에 제실을 짓고 3년간 모신 정성을 보였고,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는 사당의 신위를 받들고 피난하면서도 어머니를 위하여 계절에 맞는 음식과 의복을 준비해드리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향시에 응시하여 수차례 선발되었으나 부모와 조상을 공경하기 위하여 관직 등용을 사양했다. 그러나 그의 장남은 형조참판, 차남은 공조 정랑, 막내는 정랑을 지냈다. 그의 묘역은 석물과 비석 등이 마모 및 파손되어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나 대체로 옛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사대부 묘역임에도 당시 관례로 종2품 이상 당상관에 한하여 건립이 제한된 신도비가 있어 문화유산적 연구의 가치가 높다. 특히 신도비 비문은 좌참찬 오덕령(吳德齡)이 찬하고, 전액은 당시 조선을 대표한 서예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과 김상용(金尙容)의 문체로 제작되어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2002. 12. 16.

  • 위치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산32

연성군이곤묘비 연성군이곤묘비

연성군이곤묘비

연성군(延城君) 이곤(李坤, 1462~1524)은 조선 중종(中宗) 대 문신으로서 자는 자정(子靜), 호는 녹창(祿窓)이다.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이근건(李根健, ?~1456)의 손자이자 연안군(延安君) 이인문(李仁文, 1425~1503)의 아들이다. 1492(성종 23)년 문과 급제 후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1506(중종 1)년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철원부사와 여주목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이르렀다. 첨지중추부사, 밀양부사 등을 지냈으며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봉분 왼쪽에는 방부운수(方趺雲首) 양식의 높이 176㎝의 묘표가 건립되어 있다. 흰색 대리석의 비신높이 90㎝이고, 앞면에 묘에 묻힌 사람의 신원을 쓰고 뒷면에 음기(陰記)를 기록하였는데,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음기를 짓고 글씨를 쓴 사람은 미상이나 건립 연대는 1559(명종 14)년이며, 손자인 이숙(李俶, 1518~1576)이 선친의 뜻을 받들어 세웠다. 봉분 좌측의 신 묘표는 1981년에 추가 입석한 것이다. 비신과 일체인 높이 48㎝의 운수 전면에는 구름 속에 솟아 있는 둥근 태양 안에 날개를 높이 펴고 비상하는 삼족오(三足烏)의 모습을 장식하였고, 후면에는 운문(雲文)을 역동적으로 조각하였다. 이 같은 양식의 묘표는 성남시에선 이곤 묘표가 유일하며, 전국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비석이다. 묘역에는 봉분 중앙에 상석, 4각 향로석, 장명등과 좌·우로 신·구 묘표 2기 및 상석 좌우로 문인석을 갖추고 있으나, 문인석(높이 171㎝)을 제외하곤 모두 최근에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묘역의 좌우에 복두공복(幞頭公服)을 착용한 문인석은 얼굴이 사실적이고 의습선(衣褶線)이 매우 부드러운 양식상의 특징이 있어 16세기 중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좌측의 경우 안면부에 탄흔으로 인해 파손되었으며, 홀(笏)을 마주 잡은 두 손은 굵은 손가락의 표현이 있다. 연안이씨 세장 묘역은 15세기 무렵 판교동에 처음 자리한 이후 약 6백여 년간 이어져 내려오다가 판교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대다수의 묘역이 용인, 제천 등으로 이장되거나 정리되었다. 그 중 이곤 묘와 하단에 있는 아들 이대승과 이공승의 묘만이 유일하게 원형 보존되었다.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2004. 10. 25.

  • 위치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553

광주이씨묘역 광주이씨묘역

광주이씨묘역

하대원동 일대 광주이씨 묘역은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자손들 묘역으로 인물들의 사적(史蹟)과 함께 조선 전기 묘역으로써 문화유산적 가치를 지닌 성남시의 향토유산이다. 묘역 중 하대원동 187-2번지에는 둔촌의 아들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문하에서 수학한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 1354~1419)과 부인 경주이씨, 둔촌의 증손으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1435~1503)과 그의 아들 감사공(監司公) 이세정(李世貞, 1461~1529)의 묘소가 있다. 하대원동 187-2번지 외 묘역인 243-11번지에는 둔촌의 손자 사인공(舍人公) 이장손(李長孫, 1390~1429), 증손 참의공(參議公) 이극규(李克圭, ?~?), 둔촌의 6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관서부원수(關西副元帥)로서 왜군과 싸운 장렬공(壯烈公) 이윤덕(李潤德, 1529~1611)이 있다. 306-2번지에는 둔촌의 8대손으로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후 정묘호란 때 안주성(安州城)에서 전사하여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된 충민공(忠愍公) 이상안(李尙安, 1575~1627)의 묘소가 있다. 또한 174-8번지에는 탄천의 셋째아들인 관찰사공 이예손(李禮孫, ?~1459)의 묘소가 있고, 산33번지 일원에는 탄천의 손자이자 관찰사공 이예손의 아들인 참판공(參判公) 이극기(李克基, 1426~1491)의 묘소가 있다.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2006. 3. 27.

  • 위치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187-2번지 등

신종군이효백묘역 신종군이효백묘역

신종군이효백묘역

신종군(新宗君) 이효백(1433~1487)의 묘역은 조선 전기 묘역으로써 역사적 가치를 지닌 성남시의 향토유산이다. 이효백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희삼(希參)으로, 조선 정종(定宗)의 제10왕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장남이다. 그는 궁술(弓術)이 비상하여 ‘태조의 신궁’이라고 불렸으며 <조선왕조실록> 에도 궁술에 관한 기록이 여러 차례 있고, 묘역 또한 활과 관련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에 세조의 특명으로 당상관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후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오르고 1467년 신종군(新宗君)에 봉하여졌다. 그 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세조가 친정(親征)하려 할 때 선봉장으로 내정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68년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올랐다. 묘소는 그가 늘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인데, 하루는 문득 이곳에 작은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사방을 둘러본 후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내라.”하였다 한다. 또 하루는 활시위를 당기다가 갓끈에 부딪혀 갓끈의 큰 구슬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장례 때 광중(壙中)에서 그 구슬이 나왔다고 전해온다. 묘역은 봉분 높이 240㎝, 직경 550㎝로 배위(配位) 예안현부인 최씨(禮安縣夫人 崔氏)의 묘와 원형의 쌍분으로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다. 그 외에 묘표, 상석, 혼유석, 향로석, 장명등, 상석 좌우로 8각 망주석과 문인석 한 쌍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3m의 거리를 두고 2단의 계체석을 두었다. 그 중 묘표는 전·후면에 있고, 전면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다. 건립 연대는 1504(연산군 10)년이다. 다수의 석물 중 문인석은 복두(幞頭)에 계란형 얼굴이며 코는 크고 뭉툭하며 옷소매가 길다. 크기는 좌가 203㎝, 우는 194㎝이며, 얼굴 부분은 좌가 64㎝, 우가 58㎝이다. 묘역에서 묘지석(墓誌石)이 출토되어 현재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487(성종 18)년에 제작된 것으로 청화백자에 음각하였다. 지석은 모두 6편인데 첫 번째 지석은 분실하였다.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2008. 9. 17.

  • 위치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0-8

청주한씨청연공파 묘역 청주한씨청연공파 묘역

청주한씨청연공파 묘역

분당구 율동 도랫말은 관찰사 한혜(韓惠, 1403~1431)의 아들 문정공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묘를 쓰고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은 이래로 그 후손이 약 400여 년간 세거하면서 한씨촌을 형성하였다. 율동 산 9-1에 위치한 성남시 향토유산 청주한씨 청연공파(靑蓮公派) 묘역은 당대 유림들로부터 최고의 문사로서 추앙받고 호당(湖堂)에 뽑힌 청연공 한지원(韓智源, 1514~1561)을 필두로 그의 아들 한술(韓述 1541~1616)과 한회(韓懷, 1550~1621), 그의 손자 한명욱(韓明勗, 1567~1652), 증손 한전(韓甸, 1609~1691), 5대손 한숙(韓肅, 1691~1708) 등을 포함한 6대에 걸친 묘역으로 16~17세기까지 약 2세기 동안 조성되었다. 묘의 양식에는 부분적 차이가 있으나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제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문인석의 각 양식들은 조성 시기별로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으며, 묘비들의 경우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독특한 서체로 쓰여 있어 사료적·예술적 가치를 함께 지닌 문화유산이다.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2009. 6. 25.

  • 위치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9-1

덕수이씨의정공파 묘역 덕수이씨의정공파 묘역

덕수이씨의정공파 묘역

덕수이씨는 경기도 개풍을 본관으로 한 종중으로서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을 배출한 조선시대 명문가이다. 성씨 중에서는 비교적 늦게 고려 말 시조를 두었으며 후손이 전국에 4만여 명 이내인 가문이나, 중종 대부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성기를 이루어 뛰어난 문무관을 고르게 배출하였다. 덕수이씨가 성남시에 정착하게 된 것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해풍군(海豊君) 이함(李菡)이 성남의 고등동 사패지에 부친 풍성군(豊城君) 이의번(李宜蕃)의 묘를 쓰고 세거하면서이다. 이후 이함의 증손자 의정공 이경민 대부터 가문의 번영을 이루어 500년 세거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의정공파 묘역에는 이경민의 할머니 진주 정씨, 아버지 이통, 형 이경안, 계배 성주 이씨, 아들 이래까지 4대로 이어지는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각 묘역에는 17세기 석물 양식인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 등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통(李通) 묘표(墓表)는 이경민이 쓴 것으로 조맹부체를 수용한 점이 특징이다. 1684년 3월에 세워진 이경민 묘 좌측의 묘표 비대(碑臺)는 3가지 문양이 함께 새겨진 희소성 있는 석물로서 이례적으로 귀부(龜趺)가 설치되었으며, 백색 대리석 비신(碑身) 및 일원문 비두 등을 갖춘 매우 우수한 조각에 해당한다. 글씨는 아들인 이유가 썼으며 왕희지체의 필법을 따르고 있다. 이통의 일월문 묘표와 거북 꿈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경민의 운수귀부 묘비는 전통 신앙과 고장의 설화가 연계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례는 전국적으로 극히 드물다.

  • 지정종목

    성남시 향토유산

  • 지정일자

    2012. 12. 21.

  • 위치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555-1

이 페이지에 만족하시나요?